lacri [2] · MS 2002 · 쪽지

2011-11-07 09: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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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수능 3일 전으로 돌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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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능이 치러지는 주가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내 스스로 수능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던 일이 수능 시험과는 뗄레야 뗄 수 없었던 일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올해는 여섯시 반이면 출근하고, 퇴근을 해 도착하면 이미 밤이 어둑어둑해져서 등하굣길의 수험생들을 마주치지 못하지만, 3학년 학생들 그리고 재수생들이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눈에 선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첫 수능을 본지 이미 11년, 이제와서 언어 영역은 이렇게, 수리 영역은 저렇게 하라는 말을 하기는 조금 민망하고, 멀지만 생생한 기억을 되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내가 11년 전 수능을 3일 남겨놓은 시점으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할텐데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전해 본다.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오늘을 보낼 것이다.

넉넉하게 이른 시간에 잠에 들어 6시와 6시 반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어제까지 하지 않았던 일을 새삼스럽게 하지 않고, 어제까지 먹지 않았던 음식도 새삼스럽게 입에 대지 않을 것이다. 어제처럼 아침에는 언어와 수리 영역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외국어 영역과 탐구 영역 공부를 하고, 밤에는 가족과 식사를 하며 친척과 친구들, 주위 사람들의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한 번 더 할 것이다.


불안해 하지 않을 것이다.

3일 후에,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알고 있는 대로 풀고, 잘 모르겠는 것은 최대한 고민해서 적은 수의 선택지를 남긴 후에 제일 그럴듯한 것을 찍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내가 아는 문제를 틀리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적어도 3년, 길게는 12년 동안 수험 공부를 해왔고, 남은 3일의 공부량은 시험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남은 3일 동안 내가 모르고 있거나 잘못 알고 있던 것을 내가 새로 알게 되고, 또 공교롭게도 그 문제가 시험에 나올 확률은 거의 없다. 시간이 난다면 틀렸던 문제들을 한 번 훑어볼 것이지만, 그렇지 않아도 별 상관 없다. 너무 당연하게도 시험장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오가는 올해 나온다는 소문이 도는 문제, 뒤늦게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이런 저런 비법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오늘까지 있었던 일들을 한 번 떠올려 보고, 친구들에게 시험 잘 치르자는 연락도 돌리고, 고마웠던 일들에 대해 얘기해 볼 것이다. 잠이 오지 않으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기분 좋은 일들, 행복한 일들을 떠올리고 내 인생을 3일 단위가 아니라 3년 단위로 생각해 보며, 앞으로 있을 더 좋은 일들을 상상하며 잠을 청할 것이다.


결과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수백 개의 객관식 문제를 푼다는 것은 수백 개의 확률을 층층이 쌓아나가는 과정이다. 어떤 문제를 내가 맞힐 확률은 99%겠지만, 어떤 건 50%일 수도 있고, 어떤 건 30%일지도 모른다. 내가 받는 점수의 총합은 이러한 확률들을 쌓아놓은 결과이고, 그 확률의 조합이 양 극단으로 벗어나면서 말도 되지 않는 낮은 점수나 높은 점수를 나에게 주게 되는 경우는 실질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해한다. 실수를 해서 틀린 것 같은 문제도 실제로는 내 실력을 반영하는 것이며, 나와 비슷한 성적을 받으며 나와 경쟁자가 될 다른 누구들도 마찬가지로 내가 한 것만큼의 실수를 하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리 영역 시간에 언어 영역의 점수를 생각하지 않고, 외국어 영역 시간에 수리 영역의 실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지식 외에, 시험 전 날 잠을 푹 잤는지, 몸에 아픈 곳은 없는지, 시험을 보는 장소, 내 주변에서 시험을 치르는 낯선 수험생들도 내가 실수하지 않을 확률, 더 좋은 성적을 얻을 확률에 약간의 영향을 미친다는 걸 이해하고 있지만, 그런 것들은 내 점수에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 미미한 요소로, 그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거나 걱정을 하지는 전혀 않을 것이다. 내 성적이 더도 덜도 아니고, 온전한 나의 실력을 나타낸다는 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모든 시험이 끝나면 입시 요강이나 경쟁자들의 점수가 아니라, 내 10대의 마지막 순간을 챙길 것이다.

수능이 끝난 후 내 주변에서 내 감정을 동요시킬 수많은 말과 사건에도 불구하고, 가채점을 하고 대략적인 내 위치를 확인한 후, 시험을 본 그날에도 평소처럼 잠자리에 들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음날부터 매일 일정한 시간에는 논술 공부를 할 것이고, 그럴 필요가 없다면 다음날부터 내 인생에서 주어지는 가장 소중한 여유시간을 소중하고 알차게 즐길 것이다. 그러기 위해 시험 바로 다음날부터 남은 3개월을 어떻게 보낼지 계획을 짤 것이다. 그 계획이 세워지고 나면, 제일 먼저 서점에 가서 간신히 들고 올 수 있을만큼 많은 책을 사고, 학교에서, 집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그 책들을 읽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읽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실용 서적들이 아닌 순수 문학 작품들과 이름만 들어 보았던 고전에 빠져볼 것이다. 학교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면 바로 어디로든 여행을 떠날 것이다. 입시와 관련된 숫자들에 신경을 쓰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정말 소중하고 하고 싶던 일들에 내 시간을 던질 것이다.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3일 후 내가 어떤 결과를 받아들든 간에, 3주 후에도, 3개월 후에도, 3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여전히 진심으로, 전적으로 내 편이 되어 주시고, 지금까지 항상 그래오셨듯 앞으로도 계속 내가 잘 되기만을 바라며 키워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앞으로도 응원해주실 부모님께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반드시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아마 그 말을 할 기회는 오늘이 아니면 꽤 오랜 시간 동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를테니까...



오르비 회원 여러분들이 간절히 원해온 일들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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