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이 바라보는 수험생활 수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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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장마가 거쳐 간 계곡 같았다.
범람하는 물결이 빠르게 하류로 흐르는 계곡처럼,
세상 또한 수많은 스캔들로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거친 물결아래 내 몸을 마모시키는 바위처럼,
우두커니 홀로 박혀있었다.
아니, 어쩌면 어디로 흐르는지도 모른 채
주변 상황들에 부딪히며 깨어지는 작은 자갈이었을 지도.
깍뚝썰기를 한 듯한 독서실에는 지독하게 익숙한 것들이 존재한다.
3년 째 다니고 있는 독서실. 특수책상과 듀오백 의자가 진열되어 있는 독서실. 에는
벽걸이 에어컨 하나. 책상위의 비슷한 책들. 그리고 비슷한 사람들.
비슷한 목표들. 마지막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스물의 나 하나까지가 존재한다.
‘신분 상승’이라는 단어와 ‘자아실현’이라는 단어의 합산은 ‘시험’이라는 단어로 규정될까.
스물의 나는 위의 두 키워드에 매료되었다.
나는 두 키워드와 시험을 위해 ‘자율성’을 발휘하여 스스로에게 ‘고립’을 부과하였다.
나의 스물을 정해주는 것은 공부계획을 적어두던 플래너.
그 플래너에는 오늘의 계획, 이번 주의 계획, 모의고사 이전까지의 계획이 적혀있었다.
또한 독서실 서랍장의 안쪽에는 재수의 목표와,
대학가서 하고 싶은 일들을 A4용지에 출력해 붙여두었다.
그 외에도 눈에 띄는 곳곳 마다, 내가 꿈을 이루면 누군가에게 꿈이 된다.
참된 성장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며 이루어진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미래를 낙관하는 메시지들부터,
이번에도 실패하면 나는 재기불능인간이다. 도피하려는 자, 평생 도피만 하여라.
나는 모든 희생위에 서있더라. 같은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들을,
내가 볼 수 있는 여러 공간에 휘갈겨 적어두었다.
성년기로 접하는 나의 과도기는 그렇게, 그렇게
다가올 미래를 성실히 응시하지 못한 채,
가슴 높이의 물살에 휩쓸린 아이처럼 허우적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오늘의 플래너를 펼쳐본다. EBS와 기출문제가, 계획의 주를 이루는
메가스터디에서 선착순으로 뿌린 플래너.
어제의 할당량은 2시간동안 EBS 수능완성 운문유형 18~20강.
1.5시간동안 EBS 수능완성 유형연습5, 4시간동안 기하와벡터 수능완성.
3.5시간 동안 외국어 실전모의고사4 풀고 분석, 2.5시간동안 화학2 6~10파트.
이 날의 목표 공부량은 13시간 30분. 실제 공부량 11시간 15분. 대략 이런 식이다.
13~14시간의 목표량을 잡아두고 어떤 날은 14시간,
어떤 날은 12시간, 11시간. 어떤 날은 7시간, 0시간. 장기간의 평균 공부량은 11시간.
12시에 자고 6시에 일어나던 나의 스물은 집에서 두 시간 공부한 뒤
오전 아홉시쯔음 독서실. 점심은 칼로리 바란스와 우유 섞은 미숫가루로 때우고 7시까지 공부.
집에 와서 저녁먹고 도서관으로 옮기면 여덞시에서 열한시까지 마무리 공부.
집 와서 정리하고 누우면 열두시. 집 두 시간. 독서실 열 시간. 도서관 세 시간.
이렇듯 나의 하루‘들’은 극적인 요소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타성에 젖은 나 자신만이 존재할 뿐.
세상은 장마가 거쳐 간 계곡 같았다고? 나는 마모되는 바위, 혹은 깨어지는 자갈 같았다고?
스물의 나는 정말로 세상이나 나 자신을 저렇게 생각했을까…….
라고 생각하는 나는 지금 스물 세 살이다.
대학을 가고 싶어 공부하던 스물의 이야기를, 대학교 2학년이 되어 되짚어보는,
이 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수험생활의 수기일까? 자전적 소설일까? 스토리가 있는 칼럼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 자신의 현재를 과거와 연결 짓고자하는 노력일까?
또한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의 일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나는,
왜 독서실에 고립되던 스물을 서사의 기준으로 잡았을까?
가장 열심히 공부하던 열아홉도, 대학가기 직전의 스물 하나도 아닌, 불안정하고 애매한 스물을?
이 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스물과 스물셋의 연관성, 과거와 현재의 연관성은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들이 내가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목표다.
다시, 스물로.
1월 2일에 나는 담배를 물었다.
내가 발 뻗고 잘 수 있는 곳은 양산형 아파트의 한 칸이다.
이 한 칸에서 나와 십 분가량 뚜벅뚜벅 걷는다. 걷다보면 어느새
나와 나이가 똑같은 밋밋한 도서관과 맞딱 드리게 된다.
1월 1일은 도서관 휴관일. 1월 2일은 문을 여는 시립도서관의 새해 첫날.
관공서의 딱딱한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는 이 공간은 나의 청소년실 출입을 막는다.
나의 도서 대출증으로는 더 이상 청소년실에 들어갈 수 없다.
성인실을 더듬는다. 저마다의 얼굴표정으로 무장한 이들이 모두 자리를 매꾸고 있다.
나는 갈 곳을 잃는다. 슈퍼로 향한다. “세븐 일레븐 주세요”라고 말한다.
‘세븐 일레븐?“이라고 갸웃? 거리던 주인아주머니는 민증검사 없이 ‘마일드 세븐’을 주신다.
아직도 미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1월 2일.
3월 2일에는 앉은 자리에서 책 한권을 단숨에 읽었다.
소통통로 없는 깍뚝썰기한 독서실, 아직은 쌀쌀한 3월.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3월 2일.
나는 요일을 기억할 수 없는 반복 속에서 자이스토리를
풀다가, 풀다가, 풀다가 갑자기 펜을 꺽어버렸다.
나는 적막과 냉기가 흐르는, 80명이 수용가능 한, 그러나 3명만이 존재하는 독서실을 ‘탈출’했다.
고등학생이건 대학생이건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3월 2일에 오전.
거리에 학생은 없더라. 어, 이상하다? 나도 학생인 것 같긴 한데.
학원가 거리를 거느리다 서점에 들어섰다.
학원가의 서점이라 내가 풀던 EBS수능특강, 자이스토리, 메가스터디N제,
쎈수학 등의 수험서적이 메인에 위치해있다.
그리고 3월 2일의 특수성으로 인해 서점은 학교에서 미리 언급받은 보충교재들이 널려있다.
안양외고, 평촌고, 신성고, 양명고, 과천고 양명여고.
서점을 거닐다, 거닐다, 거닐다. 나는 베스트셀러칸에 진열되어 있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집어 든다. 제목이 먼저 나에게, ‘너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던 그 에세이집은 나에게,
너는 지금 아직 인생의 오전 6시 일뿐이라며 말을 걸었고,
‘너’라는 ‘꽃’이 피는 시기는 개인마다 다르다고 해주었다.
삶의 답은 자신의 눈동자에 있다고도 해주었고
자아가 부패하지 않게 오늘을 해결하라고 해주었다.
또한 로마를 로마로 만든 것은 시련이라고도 해주었고,
재수생은 인생의 가장 예민한 시기에 나름 깊은 좌절을 맛보았고,
그 좌절의 시기에 나태해지지 않는 연습을 한 친구들이라고도 말 걸어주었다.
5시간인가 7시간 동안 그 책을 계속 붙잡고 있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런 경험은 스무해동안 처음이었고 다가올 스무해 동안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애매하게도, 카타르시스는 느꼈지만 외적 상황이 해결되진 않더라.
그냥 울고, 끄덕이고, 끄덕이다 말았다.
5월 19일에는 병무청에 다녀왔다.
5시 40분에 일어났다. 지하철을 타고 보라매역까지 갔다.
서울지방병무청에 도착했다. 난 경기도민인데, 왜 서울이지? 하는 의문은 잠시.
신분을 증명 받으려 늘어선 줄 하나에 나를 위치시킨다.
늦게 위치시킬수록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빨리빨리.
신분확인을 받은 청년들은 개성을 내려놓는다.
제각기의 빛깔로 병무청을 찾은 스물들은 모든 개성에서 벗어난다.
A부터 Z까지 시키는 대로 늘어선 줄에 자신을 여러 번 위치시킨다.
이러한 과정이 어쩌면, 어른이 되는 과정이리라 믿는 채.
효율성과 의무를 위해 개성을 잃는 과정이.
그 무리 속에 독서실대신 병무청에 등장한 나도 있다.
심리검사 설문지에 입대하면 적응하지 못할 것 같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란에 체크한다.
2차 심리검사를 한다. 상담하며 독학재수가 어쩌구 저쩌구…….
집단생활이 어쩌구 저쩌구……. 거리다. 상담자의 태도를 관찰한다.
불신에 가득 찬 눈초리. 체념한다. 어쩌면 그 시기엔 그 누구의 눈빛도 불신으로 읽었으리라.
결국에는 시력으로‘만’ 3급을 받는다. 스물, 스물의 나는 보라매역 근처에서,
불신을 읽어내다가, 현역으로 입대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다.
7,8월? 11월?
컴퓨터를 뜯어고치고, 초침시계를 모두 없애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의 나는 소음에 병적으로 민감했다. 째깍째깍 시계의 초침소리,
하드디스크가 위윙 돌아가는 소리. 새어나오는 TV 소리. 도서관 앞에서 공사하는 소리.
중고TV, 컴퓨터, 에어컨 산다는 소리. 선거 유세하는 소리……. 가,
나의 내면에 균열을 일으킬 때면, 피가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가는 느낌이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재수이지만 나 자신은 한없이 초라했고,
스스로가 자초한 고립은 단어그대로 고립이었다.
사건 없는 기억. 기억나지 않는 일상, 어쩌면 기억하지 않는 것이 도움되는 일상.
마지막 130일 동안 스탑워치로 기록한 순공부량이 1374시간 56분.
이라는 것이 나의 7월 이후 삶의 전부이다.
물음들로 돌아가자.
스물 셋인 내가 전달하는 나의 스물은, 정말 저 모습이었을까.
저런 모습이던 스물은. 스물 셋인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스물을. 떠올리는 스물 셋의 스물여섯은 어떨까.
스물 셋.을 떠올리는 내가 아닌 스물에게 나의 글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열아홉, 스물, 스물하나의 나는 왜 그리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아마 꿈이 없어서리라.
역설적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 아니라, 꿈이 없어서 공부했다.
나는 내 삶의 주관과 방향성이 없었고 세상의 시류에 부딪히며 휩쓸리기만 했다.
뿌리 없는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불안정했다.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졌고 타인의 시선에 취약했다.
결국엔 제도권에서 기득권을 차지할 수 있는 편한 선택을 했다.
선택을 할 때 필요한 고민은 지워버렸다.
그래서 선택과정은 쉬웠지만 선택을 이루는 과정은 고달프더라.
꿈 없이 기득권만을 차지하려던, 나는 결국 스물둘에 대학생이 되었다.
차선의 기득권은 획득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비어버렸다.
이젠 외적인 목표도 계획도 존재치 않았다.
그러한 나의 새내기생활은……. (이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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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정산공 감
안녕
너무 길다 ㅠㅠ
요약 3줄이 필요하다 ㅋ
제발ㅋㅠㅜ
후.. 수능만 바라보는 수험생들에게
깊은 사고와 시간의 숙성을 요구하는 글을 쓰는것은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작가지망생의 아집인가..
ㅠㅠ.. 그냥 읽기 쉽고 편하게 쓰면, 읽어도 찰나긴 한데..
사실 대부분이 원하는건 찰나니까..
찰나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서로 지치게 만드네..
읽으면서 진짜 작가지망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ㅋㅋ
잘읽었습니다 다음편기대할게여
아뇨
전 가볍게 쓰는 글보다 이런 심오한 글이 더 몰두하게 되고 감동도 배가 되는걸요!^^
모든 사람에게 맞출순 없잖아요. 짧은 글 읽고 싶은 사람은 안 읽으면 되죠.
저랑 나이가 같으신데 필력이 너무 뛰어나셔서 저는 초라해지네요 ㅠ
전 생각해보면 뚜렷한 목표도 잃었고 단지 신분상승이란 한 단어 때문에 다시 공부하고 있는것 같아요.
타인에 눈을 의식하여 기대에 충족하기위한 공부랄까...늦은 밤 많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좋은 글이네요
다음글도 기대할게요!!!
ㅠㅠ 비교하지말자님글은 작년부터 읽었는데, 아무래도 공부하다가 지친수험생이 읽기엔 집중력이 많이 필요할것같아요. 근데 아침이나 정신맑을때 읽으면 그만큼 더 깊이가 느껴져서 좋아요 !
넹 감사합니다.
시간 때우는 글을 쓰고 싶진않아서..
와.. 인생이란 시한편을 읽는 것같네요..
굳이 요약이 필요한지 모르겠네요. 공감되면서 잘만 읽히는데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정말 글 잘쓰시네요ㅋㅋ ㅎㅅㅎ..
꿈을 이루기위해 공부한것이 아니라 꿈이 없어서 공부했다.
저의 경우,
꿈이 있었지만,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
꿈이 있으나없으나 수험생의 궁극적인 본질은 비슷합니다...
문학작품같아요ㅎㅎ잘읽었습니다
책한권 읽는줄 알았습니다 ㄷㄷ 대단하시네요
안양사시는분 보니반갑네요ㅋㅋ
ㅋㅋ거짓말안하고 읽고잇다가 눈물고였습니다 나는 왜공부를하고잇는지 또 궁금해지네요...ㅋㅋ잘읽고갑니디!!
글 정말 잘 쓰시네요... 나와 나이가같은 도서관이라니..ㅠㅠ
멋저요 작가하셔도 될듯 !! 잘 보고가요~
수험생때도 뵙고 대학생때도 뵙네요 ㅎㅎㅎ 작성자님 글 보고 힘 많이 내서 저도 연대 갔습니다 많은 부분이 공감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