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깡길렘 [409348] · MS 2012 · 쪽지

2015-05-30 11: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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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 폐지'란 아젠다에 관한 철학적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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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 문제가 일종의 딜레마라고 생각해요. 수시로 뽑는 쪽이 대학에 대한 충성도는 더 높을 수 있지만, 정시가 갖는 역동성(예컨대 장수생도 능력만 있다면, 검고생도 능력만 있다면 '공평하게'(논란이 될 법한 워딩입니다만) 뽑아가는 그런 것)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죠.



  수시는 또한 (비록 검증은 안/덜 됐지만) 대학 전공에 대한 적합성이 높은 만큼 대학의 인적 자원의 아웃풋이 비교적 뛰어날 수 있을 테고,

  정시는 대신 '인풋'이 월등히 뛰어나겠죠. 서열 세우기에 탁월한 시스템이니깐요. 어떻게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수능을 치열하고 치밀하게 공부할 테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공부 머리'라는 학습인지과정 일종을 계발시키는 데 신뢰성 있는 유인 효과가 되겠죠.


  그러나 단순히 이러한 상대적인 비교 그리고 이에 그치는 상대주의로의 귀결은 바람직한 논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짧은 소견으로는, 우리의 상호주관적 의사소통 공동체(=하버마스적 '공론장')을 통해 절차적으로 어떤 <관점>이 더 유익할지에 대해 상호 경합적 논증을 치열히 교환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점'이란 어휘에 제가 강조 표시를 뒀는데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관점들의 대비 구도를 예고하기 위해 노린 효과였습니다: "세계적으로 볼 것이냐, 지역적으로 볼 것이냐?"

  

  저는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제 나름대로 세운 철학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실재'(실제 존재-대상들)를 '인식'하는 데는 두 가지 심급(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원초적 준거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심급은 바로 '세계적'과 '지역적(국부적)'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실재를 세계적으로 보는 입장과 국부적으로 보는 입장으로 항상 이분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식론이라는 철학적 중요 제재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답입니다. 이제부터는 저의 이러한 인식론적 바탕을 저변에 깔고서 저의 생각을 읊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나'의 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 '인식'할 때, 혹은 좀 더 심플하게 말해 그것들에 대해 사유할 때 늘 그 대상에 대해 어떤 규정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칸트 철학을 해설할 때 말해지는 '선제'란 것이며, 이는 쉽게 말해 '우리'('나')라는 필터링을 거쳐야만 세계(대상)가 비로소 '세계'로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더욱 자세하게 말하자면, 내가 사과를 볼 때 그것은 사과라는 그것 자체(물자체)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포착이 아니라 내 안에서 모종의 규칙에 의거해 사과의 인식적 구조가 재구성돼 내 안에 비로소 '사과'로서 인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조금 빗겨나갔는데, 요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나 아닌 것'을 사유(인식)할 때 그것에 대해 선제를 세팅하고 시작한다는 것이며, 그로써 필연적으로 우리는 자기 고유의 어떤 규정을 대상에게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규정이 곧 상기한 두 가지의 심급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죠. 이 규정을 일종의 프레임(인식의 틀)이라고 상상할 때, 이 틀의 모양은 결국은 두 가지뿐입니다. 하나는 '세계적'이라는 모양이며, 다른 하나는 '지역적(국부적)'이라는 모양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간단한 대조를 들죠. 서양철학은 늘 세계적인 걸 말해왔습니다. 반면 동양철학은(모두가 그런 건 아닐 테니 일단 공맹자에 국한하자면) 지역적인 걸 말해왔습니다. 서양철학은 언제나 '나'와 '세계'라는 이항대립에 관심이 있었고 또 거기에서 사유가 출발해 종료를 맞이했고, 동양철학(공맹자)은 비록 천하에 대해 논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장 큰 범주'로서의 '세계'를 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공맹자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로서의 천하를 말했고, 이는 공맹자의 사상이 지극히 현상유지적이며 구체적이었음이 방증합니다. 아무튼, 인식하는 방법론에서 서양-동양은 다릅니다. 전자는 '나'-'세계'라는 이항대립을 통해 '가장 작은 범주'-'가장 큰 범주'를 말했고, 이는 곧 세계적인(세계라는 보편성을 독점하려는) 사유로 이어지죠. 반면 후자는 현실, 그리고 구체적 사실들에 주목했고 여기에 대해 특유의 동양철학적 논리를 통해 자신들의 사상적 튀김옷을 입혔습니다.



  갑자기 철학 칼럼이 되어버린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드는데(...) 제가 하고 싶은 본론으로 돌아가죠. 우리는 세계적인('세계'를 논하고 '지배하려는') 인식과 지역적인(현실-구체를 중심에 두고 거기로부터 파급되며 따라서 상정됐을 뿐인 허구적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현실을 '지배하려는') 인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중요한 것인데, '정시 폐지'란 아젠다에 관한 여러분의 견해는 결국 위와 같은 두 갈래의 인식론적 심급으로 마찬가지로 되돌아갑니다.

  수시를 지지하는 입장은, 결론부터 말하면 '세계적인 인식'입니다.

  정시를 지지하는 입장은, 역시 결론부터 말해 '지역적인 인식'입니다.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시를 지지하는 근거가 '대학에 대한 충성도', '전공적합성'이라고 했을 때, 이것들은 결국 두 가지 수준에서 다음으로 환언됩니다. 하나는 '모교와 졸업생의 긴밀한 네트워크의 세계성' 및 '입학사정관으로 표상되는, '전공은 일찍부터 준비해야!'란 인식의 세계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대학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이 확충된다' 및 '전공이 적합한 애들끼리 경쟁을 해야 더욱 밀도 높은 아웃풋이 나오고, 이것은 글로벌 시장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데 기여한다'입니다.

  반대 편의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시를 지지하는 근거가 '입시 과정의 역동성' 및 '인풋의 자가계발 유인'이라고 했을 때, 이것들 역시 결국 두 가지 수준에서 다음으로 환언됩니다. 하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입시 과정의 역동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계급 간 이동이 폐쇄된다(역동성의 지역적 특수성)' 및 '대한민국은 전통적으로 서열 세우기를 통해 발전을 이룬 나라(지역)이다. 서열 세우기는 이 나라의 특수적 맥락을 고려했을 때 근거가 있으며 또한 그 자체로도 다분히 경쟁력 있다(서열 세우기의 지역적 특수성)'입니다. 다른 하나는 '역동성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지역) 자체가 갖는 미래적 경쟁력을 보증하는 수표다' 및 '서열 세우기 역시 마찬가지이다'입니다. 조금 혼란이 올 수 있는데, 정시 편의 근거를 재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즉, 지역적 특수성(특수 맥락)을 고려해야 한다는 근거와 지역적 특수성이 산출하는 지역 자체의 생존력/경쟁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근거로 나눠서 이해하시면 좀 더 직관적일 겁니다.






  으아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지치네요...

  아무튼, 일단 저는 여기까지 수시 지지/정시 지지 편 각각이 결국 어떤 형식의 주장으로, 그리고 어떤 근거로 심급 및 환언되는지를 분석해보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어느 쪽이 맞는지 아직까지는 잘은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지역주의자이므로 정시의 손을 들어야 일관성이 유지되겠지만, 그래도 수시가 갖는 특성 중 '전공적합성'은 상당히 매력적인 논리적 기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아무튼, 이렇습니다. 여기까지(혹은 중간부터라도) 이 긴 졸문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s: 이곳에 '공론장'을 마련해 "절차적으로 어떤 '관점'이 더 유익할지에 대해 상호 경합적 논증을 치열히 교환하여"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 것은 어떨는지요.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논증'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면 '수험생 사이트' 오르비이니만큼 상당히 생산적인 논의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아, 물론 이 게시글이 '공론장'이 되어도 좋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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