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는 이야기] 신라(新羅)의 태조(太祖)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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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에 묘호(墓號)를 쓴 나라는 신라가 유일하다.
(물론 고구려 왕의 시호는 포괄적으로 묘호를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예컨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국강상은 묘호이다. 국강에 묻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고구려 군주의 명칭이 태왕이라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은 full 시호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광개토왕 단 한 명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안 것은 광개토대왕릉비, 즉 금석문의 힘이다. 미천왕은 미천XXXXXX호'양'왕이며, 양원왕은 양강상XXXXXX호X왕이다. 평원왕은 평강상XXXXXX호X왕이다.)
결국 중국식 묘호를 쓴 나라는 신라가 유일한데, 모든 왕에게 묘호를 붙이지는 않았다. 오직 무열왕만이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갖고 있다. 이 묘호를 갖게 된 것도 당나라와의 심각한 외교전을 통해서 얻어낸 외교적 성과이다. 원칙적으로 묘호는 천자만이 가질 수 있으며, 당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한 신라의 경우는 묘호를 쓰면 안 되기 때문인 것이 첫째 이유요, 둘째 이유는 마침 당나라 당시 황제가 당 태종이여서, 우리 당 태종의 업적에 너네 신라 김춘추의 업적이 비교가 되냐? 라면서 따지고 들었던 것이 둘째 이유이다.
그러나 숨겨진 묘호를 가지고 있는 왕이 하나 있는데, 바로 신라 태조(太祖)가 그것이다. 신라 태조는 바로 김알지의 장남 김세한 (혹은 김열한, 김성한) 이다. 김알지가 아닌 김세한이 신라 태조의 묘호를 갖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나, 금석문 발견으로 인해 신라 태조가 김세한으로 밝혀졌다.
신라에서 시호를 쓰기 시작한 것은 지증왕 때부터이다. 그 전의 21대까지 군주의 이름은 모두 군주의 이름 그 자체에다가 ~이사금, ~마립간을 붙인 것이다. 소지마립간의 이름은 소지고, 자비마립간의 이름은 자비다. 지증왕의 이름은 지대로 혹은 지철로인데, 드디어 '시호' 가 생긴 것이다. 군주 22대 만에.
신라 왕계는 크게 무열왕계와 원성왕계로 구분된다. 무열왕계는 장남 가문(눌지 직계)이고, 원성왕은 눌지의 바로 밑 동생 복호의 11대손으로 차남 가문이다. (무열왕계의 마지막 왕 선덕왕은 3남 가문인 미사흔 가문이나, 성덕대왕의 외손이고 경덕왕의 생질이기에 무열왕계로 구분한다.)
박제상(김제상)이 없었다면 선덕왕도 원성왕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김세한은 무열왕계와 원성왕계의 공통 시조이다. 따라서 태조라는 묘호가 붙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재위하지 않았는데도(왕이 되지 않았는데도) 태조가 된 사례는 중국에서도 흔하다. 당의 창건자 이연의 묘호는 고조이고, 그 아버지의 묘호가 태조이다. 위의 창건자 조비의 묘호는 세조 혹은 고조이고, 그 아버지 조조의 묘호가 태조이다. 원의 창건자 쿠빌라이의 묘호는 세조이고, 그 할아버지 징기스칸의 묘호가 태조이다. 청의 창건자 순치제의 묘호도 세조이고, 그 할아버지 누르하치의 묘호가 태조이다. 서하 창건자 이원호의 묘호는 경종이고, 그 할아버지 이계천(척발계천)의 묘호가 태조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모두 그 왕조의 '실질적' 창건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세한은 신라의 실질적 창건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라는 묘호를 받은 것은 희귀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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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6대 태조왕 의문의 1패
태조왕은 웃기게도 태조가 묘호가 아닌 시호인 경우입니다.
고구려식 시법은 무조건 그 왕이 묻혀 있는 곳-그 왕의 치적-호-나름의 글자-왕이 됩니다.
태조왕의 전왕들인 민중왕이나 모본왕의 경우도 묻혀져 있는 곳만 밝혀져 있고 전체 시호는 밝혀져 있지 않은 경우입니다.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대무신왕,장수왕 등은 반대로 치적에 해당하는 시호들만 밝혀져 있고 어디 묻힌 지 알 수 없는 경우입니다.
고구려 태조왕은 시호이고, 신라 태종무열왕은 묘호라고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나요?
아울러 신라 "태조" 같은 경우는 특별히 묘호를 추존했다기보다는 그냥 "시조"와 같은 의미로 부른 것으로 보이는데...
제가 마음대로 단정하는 게 아니고 삼국사기가 밝혀주는 내용입니다. 저도 솔직히 안장왕이 있으니 보장왕은 시호같습니다. 왜냐면 보장왕 항렬에서는 영양왕과 영류왕의 아들들미 모두 환 자를 돌림자로 이름에 썼기 때문입니다. 백제 의자왕도 저는 개인적으로 시호일 가능성이 높다 보지만 삼국사기는 그의 '본명' 으로 못박고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 보장왕이 재위하고 있을 때도 당측 기록은 보장왕을 일관되게 고구려왕 "장"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중국 측 기록에서 우리 측 왕의 이름을 1자로 줄여 기록한것은 아시겠지요) 멸망과 동시에 후대 왕조가 들어선 것이 아닌 이상 시호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본명이라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삼국사기는 王 諱藏[或云寶藏] 以失國故無諡(고구려본기 보장왕)라고 기록해 보장왕에게 시호가 없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상)폐위된 안장왕이 또 똑같은 장이거든요. 나머지는 전부 강상인데....
영양왕대의 항렬은 대(大)이고 영류왕이 건무라는 이름을 마음대로 써서 항렬을 안 지킨 경우입니다. 영양왕과 보장왕의 아버지는 대원, 대양의 이름을 지킴으로써 항렬을 지켰습니다.
그 다음 항렬은 환이고 영양왕과 영류왕의 아들들 모두가 이 항렬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보장왕의 형제들은 지키지 않았지요.
애초에 고대 인물들에게 이름은 정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만 해도 중국에 완전히 예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작명법이 상당히 다양한 경우에 해당했기 때문에, 항렬을 도입하는 한편 항렬을 지키지 않기도 하고, 같은 사람이 3개~4개의 다른 이름을 쓰기도 합니다. 훈독과 음독이 섞이기도 하고, 고유어를 한자로 가차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혼란이 생기기도 합니다.
보장왕이 시호일 수 있다는 것은 제 개인적인 의견이고, 삼국사기는 보장왕의 이름을 보장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시호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소고구려의 존재까지 생각해 볼 때, 그리고 보장-안장의 짝을 생각해 볼 때 폐위된 왕 같은 경우에는 묘지의 규모나 등급을 낮추어서 장을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제 의견일 뿐입니다.
안장왕은 양서에는 고구려왕 "안"으로 기록되어 있죠. 삼국사기에 기록된 휘도 "흥안"이고. 문제될 건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일단 보장을 시호로 본다면 고구려 멸망 이전에 보장왕을 부른 호칭을 설명할 수 없게 되며, 시호는 누가 부여했는가도 설명할 수 없게 됩니다.
항렬 얘기가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는데 대양왕의 대양을 이름으로 보신 것이군요. 대양왕이 책봉명일지 이름일지는 알 수 없지 않나요? (일단 실제 왕이 아니었던 사람이 "왕"으로 호칭되고 있으니)
당연히 그것도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영양-대양이 같은 양(陽) 자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영류왕은 폐위됐고.... 대양이 추존시호일 수도 있다는 것도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법과 묘호법에 대해 이 정도의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이였는지는 상상도 못했네요. ^^ 감탄하고 갑니다.
(수정된 댓글에서) '태조'와 '차대', '신대'는 치적에 대한 시호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이 세 왕의 시호 작명은 다른 왕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대무신왕 같은 경우는 대주류왕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대주류가 묻힌 곳일지도 모르는 일이죠.
+ 광개토비에서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을 언급했을 때의 내용을 보면 초기 왕들에게도 광개토와 같은 긴 시호를 붙였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대주류는 대해주류의 준말이고 대무신왕 이름 무휼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대무신왕의 이름은 해무휼 혹은 해주류입니다. 이때 성씨가 고씨가 아니고, 분명히 해씨입니다. 해씨일 것이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주몽은 스스로 고씨의 성을 만들어 썼으나, 부여에 남겨진 그 아들 유리, 그 손자 무휼의 경우는 자기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에 해당하는 해모수의 성을 그대로 받아 쓰는 게 당연하니까요.
대해주류의 짝으로 소해주류가 있습니다. 이 때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죠. 일단 소수림왕의 이름에서 주류를 땄을 가능성, 그리고 주류라는 곳이 두 곳이 있어서 대-소로 구분한 점
그러나 후자가 설득력을 전자보다 좀 더 잃게 되는 이유는, 고구려는 일단 왕을 같은 곳, 예컨대 광개토왕과 고국원왕이 같은 곳에 묻혔으니(국강상) 그 전에 묻힌 고국원왕에 옛 고 자를 더하는 것으로 봐서,
주류가 시호일 가능성은 주류가 이름일 가능성보다 낮지요. ^^
동의합니다. 다소 성급한 문제제기였던 것 같네요 이건...
사소한 태클입니다만 옛 고 자가 더해진 것은 평양 천도 이후 국내성을 '국'으로 표현하기 어려워져서라고 생각됩니다. 고국천왕, 고국양왕의 사례도 있으니 고국원왕의 사례가 광개토왕과 겹치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요.
+) 글을 보면 호양왕 때문에 고구려가 '태왕' 호칭을 고유 호칭으로 쓴 것이 아니라는 논지가 있는 것 같은데, 삼국사기를 전체적으로 보면 '호'는 '미'에, '양'은 '천'에 해당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호양'은 장지명이라는 것이죠. '호태왕'과의 비교는 합당하지 않은 듯 합니다.
+ 하신 부분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일단 고구려는 시법을 어디서 가져왔을까요? 상당히 독자적이고 특이한 시법을 사용했지만, 시법 자체는 일단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 뻔합니다.
고구려 왕의 시호에는 하대 이후 모두 호(好)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다음의 글자가 태(太)인 것은 광개토왕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는 상황이고, 그 뒤의 왕은 장수왕은 호에 관한 언급이 없고, 문자명왕이 명치호왕으로 호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의 안장왕은 폐위되었고, 안원왕이 원-강상 원칙에 따라 안강상호왕, 양원왕이 양강상호왕(향강상호왕) - 이때 추군, 세군의 난리가 난 것은 아시고 있으시겠죠 - 양원왕 다음의 평원왕이 또 평강상호왕으로 나타납니다. 호(好)가 제일먼저 발견되는게 미천왕인데, 2012년의 연구 결과를 마침 말씀하시는군요. ㅎㅎ 저 역시 저 부분을 참고하여 '호X왕' 이 고구려 중대에 도입된 호칭이라는 것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식 시법을 따져보면, 효(孝)다음에 황제의 시호 '한글자' 가 오는 것을 모델로 땄을 가능성을 절대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효 다음에 오는 시호가 진짜 황제의 시호이지요. 고구려도 호 다음에 오는 한글자 시호가 진짜 그 국왕의 시호일 가능성이 높은데,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시점엔 금석문도 없고, 아무것도 알 수 없어서 조각조각 이어붙인 것이라는 거죠.
여기서 시법상 효는 효도할 효가 아니라 이을 효자로, 태조와 같은 황실의 개창자에게는 붙이지 않습니다.
물론 평양성 천도 주장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고국양왕 때문인데요, 양자를 시호로 쓰는 왕이 없는데, 국양왕과 고국양왕이 동일 시호라는 것을 보면,,,, 옛날 수도라는 의미로 쓰였을 수 있죠.
보장왕 관련한 생각의 근거는,
일단 여기서 안장왕 폐위라는 것은... 진짜 폐위가 아니라...
당시 고구려 왕실 계승 암투에서 안장왕계가 패배하고, 안장왕이 피살당하는 과정에서 안장왕에게는 '강상' 의 시호가 붙지 않고 장이 붙어 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중국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피살되거나 폐위된 황제에게, 후대 황제가 시호를 (대부분은 부여하지 않고 폐제로 부여하지만) 만약에 부여하면, 시법 중에서 굉장히 안 좋은 의미를 지닌 시호를 부여한다는 것과 똑같은 이치죠.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성화제가 삼촌 경태제를 복권시키면서 다른 황제들에게 따라오는 X종 X천X국 XXXX XXXX...하는 정식 시호를 부여하지 않고 그저 공인강정경황제, 이렇게 부여한 것이 되겠죠. 금나라의 7대 황제 위소왕도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평황제' 라는 시호가 있지요. 묘호는 없고...
그런데 보장왕 같은 경우에는 이게 안장왕의 장자와 부수가 약간 다른 장자인데요.... 여기까지만 보면 보장왕은 이름이다. 이렇게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제가 생각하는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두 장자는 뜻이 똑같다 이겁니다. '감추다'
중국이나, 소고구려측에서 부여한 시호일 가능성도 약간이나마 배제할 수는 없다 이거죠.
1. 금석문 자료에 의하면 고국원왕도 "국강상성태왕"으로 불렸습니다.
2. '양'이 '천'과 같은 의미라는 것은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각각 국양왕, 동양왕, 중양왕, 서양왕을 或云으로 기록)을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즉, '양'은 장지명의 일부입니다.
3. 함께 언급해주신 문자명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의 사례를 봐도 모두 '~호왕'으로 언급되어 있어, '호양왕'과의 친연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반면 '호태왕'의 경우는 태가 삼국사기에서 왕호를 간략하게 적는 과정에서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죠)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호양왕'이 '호태왕'과 같은 열의 호칭이 아님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안장왕 왕호에 대한 발상은 흥미롭네요.. 보장왕의 보장이 시호라고는 여전히 생각하지 않지만..
ㅎㅎ 한 4-5년동안 역덕질을 멈췄더니 딱 드러나는군요. 고국원왕 금석문발굴은 몇 년도인가요?
오..1935년 모두루 묘지네요. 한국사에는 관심이 적어서 모르고있던 사실이였는데 고을덕 묘지 발굴까지 치면 영류왕에게마저 태왕..
보장왕은 제가 중학교 때부터 하고 있는 생각인데 안장왕 금석문이나 왕릉이 나오면 모든 의문점이 해소되겠죠.
ㅎㅎ
맞다 최근 고을덕 묘지 발굴도 있었죠..
[무조건] 어떠한 시법을 사용한다고 파악하기에는 유물을 통해 확인되는 시호가 광개토왕 하나밖에 없다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고구려의 시법에 관한 연구는 이미 학계에서 굉장히 많이 진행된 상황입니다.
일단 깊이 아신다면 고구려 2대 왕에서 5대 왕까지의 성씨는 고(高)씨가 아닌 해(解)씨를 사용했다는 것도 아실 것입니다.
태조왕은 고(高)씨를 성씨로 차용했고 그 후의 모든 왕이 (소수림왕은 불확실하지만) 모두 고(高)씨를 성씨로 채택했기 때문에, 고(高)씨의 태조라는 의미에서 시호에 태조라는 의미가 섞여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애초에 '묘호를 시호에 병합한 나라' 이기 때문에, 묘호로써의 태조(太祖)가 아니라, 시호의 일부분으로써의 태조입니다.
차대, 신대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태조대왕의 두 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신 학계 연구 결과는 태조대왕의 아들뻘 내지 조카뻘들로 해석되는 것으로 판별이 되고 있습니다. 차대왕은 시호상 직계 쪽, 신대왕은 시호상 방계 쪽에서 또 새로운 왕조를 연 것으로 판단이 되는 경우지요. 이들 역시 전체 시호 중에 '차대' '신대' 만 밝혀진 경우입니다.
최진열(2012)는 광개토왕과 같은 시법이 고국원왕 이후에 자리잡았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뤄신(2012)도 삼국사기 분석을 통해 왕호는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왔을 것이라고 보고 있고요. 더 나아가 임기환(2002)은 동천왕 이전의 시호는 이후 시기에 부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동의하지는 않지만)
고구려 초기 왕호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잘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그러한 판단은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고구려나 신라 모두 제대로 된 의미로써의 '묘호'를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